아버지가 타실 수 없게 되자 차의 오른쪽 뒷문이 고장 난다. 마지막으로 타신 며칠 후 선배 한 분을 모시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안에서는 열리는 데, 밖에서는 열리지 않는 것이다. 차령 車齡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의 건강과 맞물린 고장이 공교롭다.
29만 km를 달렸지만 잔 고장 없고 주행성능도 여전하다. 몇 번이고 바꾸려 했는데, 아버지 때문에 바꿀 수 없었다. 동생이 같은 차종의 신형을 타고 다니지만, 아버지는 내 차가 제일 편하다 하셨다. 낮은 SUB라서 타고 내리기 편한 것이 첫째 요인이겠고, 내 운전습관에 익숙해지신 것도 있을 것이다. 또한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드릴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거의 국가대표급이니까.
아버지 모시는 기사분의 휴가 때, 내 차로 역삼동 사무실에 모신 적이 있다. 식구들에게 '오기사보다 20분 빨리 가더라.'고 말씀하셨단다. 최고의 기사분들이 모셨지만, 운전은 내가 제일 잘한다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운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내 차를 가진 사십칠 년 운전에 사고는 딱 여섯 번, 그것도 다 경미한 접촉사고였고, 내 실수는 세 번 뿐이다. 국내에서는 두 사람을 태우고 310km까지 달리는 만용도 부려봤다. 지금도 시간이 촉박하면 지인들은 나에게 핸들을 넘긴다.
그렇다고 운전이 거친 것은 아니다. 일 년 가야 크락숀 울리는 일은 짧게 열 번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익힌 운전 습관 때문인데, 양보에 익숙한 그 나라 사람들은 거의 크락숀을 사용하지 않는다. 급브레이크가 없을뿐더러 끼어들기, 칼치기 등의 과격한 핸들워크도 없다. 과속을 제외하면 갓길 주행이나 신호위반 등 교통법규를 어기는 일도 하지 않는다. 고교 시절 적성검사 백점 만점의 공간 지각력과 시선을 최대한 멀리 두는 운전 습관 그리고 빠르고 예민한 반응의 차를 선호하는 것이 요인일 것이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지금의 내 차를 좋아하셨다. 소천하신 후 차를 바꾸려고 매장도 들려보고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다시 아버지를 생각한다. 평생 기사 딸린 최고급 신차만 타시던 분이 정말 편해서 내 차를 좋다고 하신 걸까?
아버지는 늘 검소하셨다. 양복을 제외한 평상복 중에 비싼 것들은 다 자식들이 사드린 것이다. 명품 시계들을 갖고 계셨지만 갤럭시 워치에 만족하셨다. 몇 년 전 명품 구두를 선물해 드렸는데 아까워서 신지 못하신다. 마음에 드는 셔츠는 소매깃이 너덜거리도록 입으신다. 특히 어머니가 선물해 드린 것은 아무리 낡아도 절대 버리지 않으셨다. 혹시 새것 좋아하는 아들의 사치 성향을 꿰뚫어 보시고 지금의 차가 편하다며 절제를 바라셨던 건 아닐까?
‘절약의 미덕’과 ‘소비의 미덕’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일인지를 생각해 본다. 빈곤했던 나라를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만드신 우리의 부모님 세대를 생각하면 ‘절약의 미덕’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차에 타면 아버지가 뒤에 앉아 계신 것만 같아 자꾸 룸미러를 보게 된다. 울컥 치솟는 그리움에 눈시울이 젖기도 한다. 아버지와의 추억에서 벗어나고픈 생각과 간직하고픈 생각이 충돌한다. 에둘러 벗어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월을 자꾸 베다 보면 추억의 예리한 칼날도 무뎌질 테니까.
당분간 아버지와의 추억을 즐기기로 한다. 차가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 당분간이 제법 오랜 시간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외출도 삼 개월 반이 지났다. 일단 뒷문부터 고치고... 26년 형 풀모델체인지 소식에 눈만 반짝인다.